공부 노동에 대하여

노동이란 무엇일까? 위키 백과에 따르면 ‘경제 활동에서 재화를 창출하기 위해 투입되는 인적 자원 및 그에 따른 인간의 활동을 뜻 한다’. 이와 같이 보통 노동자, 즉 노동을 하는 사람은 자본가에 의해 재화를 창출하기 위해 투입되며, 본인 노동력의 대가로서 임금을 받는다. 임금을 받는 노동, 즉 임금 노동(임노동)이 흔히 노동과 동의어로 여겨지는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그러나 임노동이 과연 노동과 완전한 동의어일까? 모든 노동은 임노동으로서 노동력에 대한 임금을 받을까? 아니라는 것이 금방 드러날 것이다. 예를 들어, 과거 유럽의 노예 노동은 ‘경제 활동으로 재화를 창출’하기는 하나, 임금을 받지는 않았다. 좀 더 최근의 예로는 가부장제 사회에서의 가사 노동이 있다. 설거지나 집 바닥 닦기는 분명 남을 위해서도 노동력을 사용하는 행위이지만, 통상적으로 대가가 주어지지는 않았다.

공부에 대한 이야기로 넘어가 보자. 공부가 노동일까? 그러니까, 공부가 경제 활동인가? 또 재화를 창출하기 위한 활동인가? 물론 노동력이 필요한 일이라는 것에는 이견의 여지가 없겠지만, 저 둘에 대해서는 의견이 갈릴 것이다. 예컨대, 재화를 창출한다면 그 재화는 무엇인가? 그 재화가 당최 무엇이기에 나는 매일 9시간 넘게 학교에 있으면서도 PC방 1시간 이용료와 교환도 못 하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학교를 다닌다. 지식을 얻기 위해서만은 아니다. 우리는 경험적으로 대학교 졸업자가 고등학교 졸업자보다, 고등학교 졸업자가 중학교 졸업자보다 돈을 많이 벌 가능성이 높다는 것을 안다. 즉, 사회는, 그리고 기업은, 공부에 대해 가치를 인정한다. 막연히 지식인을 존경해서는 아니다. 사서삼경을 달달 외우는 사람은, 지식인으로 인정은 받겠지만, 취업에 대단히 유리하지는 않을 것이다.

사서삼경이나 창던지기처럼 학습의 영역에는 속하지만 사회가 인정을 덜 하는 공부도 물론 존재한다. 보통 이러한 공부는 취미/놀이의 영역이라는 인식이 강하다. 내가 이야기하고자 싶은 부분은 사회와 기업과, 일상생활에서는 보통 부모나 선생이 가치를 인정하는 공부이다. 문학과 미적분처럼 학교와 파생 사교육의 영역일 수도 있고, TOIEC처럼 취업 준비와 파생 사교육의 영역일 수도 있다.

나는 이러한 영역을 노동 공부라고 이름 짓기로 했다. 말인즉슨 이러한 영역에 노동력을 사용하는 행위는 공부 노동이 되겠다. 사회가 가치를 인정하기 때문에, 습득하면 미래의 경제 활동, 즉 취업과 승진, 궁극적으로는 미래의 봉급에 이익이 있으며, 이를 재화로 볼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설명한다면 노동의 정의에 통상적인 ‘공부’는 일단은 들어맞는다.

그런데 이상하지 않은가? 예를 들어, 편의점 사장이 알바에게 12년 동안 무급으로 노동을 해 줄 것을 요구하고, 그 대가는 13년이 되는 해에 편의점 본사에 추천서를 써 주는 것으로 마무리하자고 한다면, 그 제안을 받을 사람이 얼마나 될까? 현실은 더 하다. 고등학교부터는 학교를 다니려면 오히려 돈을 내야 한다. 왜 이와 다르지 않은 거래가 현실적으로 성립할 수 있는 것일까?

이유는 두 가지로 요약된다. 첫째, 편의점 사장, 즉 사회는 신뢰도가 매우 높다. 편의점 본사(기업)는 무급 노동(학교와 자격증과 고시, 즉 공부 노동)으로 확인이 된 알바(학생)의 성적을 통상 가장 중요한 평가 요소 중 하나로 생각한다. 또 나만 이러한 거래를 수락하는 것도 아니다. 수많은 경쟁자들은 통계적으로 사회의 평가를 유의미하게 해석할 수 있는 근거가 된다.

둘째, 편의점 사장은 12년 동안의 노동을 추천서로 마무리하지 않는다. 더 성의 있게 노동을 해서 좋은 성적을 받을수록, 편의점 본사에서 더 임금을 높게 받을 가능성이 크다. 이를 다르게 해석하자면, 12년 동안의 임금은 편의점 본사가 대신하여 할부로 지불한다고 볼 여지도 있다. 즉, 공부 노동의 임금을 노동력의 임금에 포함하여 할부로 지급하는 것이 사회의 운영 방식인 것이다.

그럼 편의점 사장은 좋은 사람이었던 것인가? 그럴 리는 없다. 공부 노동에는 돈이 들고, 그 돈은 일반적으로 정부와 가정이 분담하여 지출한다. 기업이 지출한 공부 노동의 임금에서, 사회적 정부와 가정에 갚아야 하는 학비, 즉 교육세나 자녀 교육비를 빼야 한다는 뜻이다. 그 결과로서 학생이 받는 공부 노동의 임금은, 궁극적으로는 노동의 시간과 강도에 비해 매우 적다고 예상할 수 있다.

그래도 여기까지는 납득이 가능하다. 특히 한국 사회에서는 나만 착취의 대상이 되지는 않으니까. 문제는, 거의 모든 학생이 공부 노동이 가장 효율적이라고 생각하는 데서 시작한다. 개인 단위에서는 확실히 맞는 소리다. 학벌과 성적이 좋을수록 좋은 직장에 간다는 건 주변에서 익히 들은 상식이고, 경험적 통계적으로도 옳다. 그런데 여기서 유추할 수 있는 경험 명제가 하나 있다.

바로 ‘공부 노동의 임금’은 ‘노동력의 임금에서 공부 노동의 임금을 뺀 것(이하 순수 노동력의 임금)’보다 높다는 것이다. 이 명제가 틀렸다면, 고등학생들은 공부 노동을 할 필요가 없다. 대신 3년 먼저 직장에 취직하는 것이 논리적으로 이익이니까. 그런데 이 명제가 옳다면, 대학원 진학률은 지금보다 훨씬 높아야 한다. 참으로 둬도 모순이고 거짓으로 둬도 모순이다. 무엇이 문제일까?

이 모순은 공부 노동에 한계 효용의 법칙이 적용된다는 가정을 하면 설명된다. 사회에서 통상 요구하는 것 이상의 공부 노동은 임금 효율이 떨어진다. 너무 적은 경우는 말을 할 필요도 없다. ‘적당한’ 수준의 공부 노동 임금을 쌓아 두고 노동력을 제공하는 사람이 최적의 효율을 받을 수 있는 것이다. 의외로 낙관적인 전망처럼 보인다. 그런데 ‘적당히’란 누가 정하는 것일까?

다시 학생의 믿음을 보자. 많은 학생은 공부 노동이 가장 효율적이라고 생각한다. 개인적 경험이 그 믿음을 정당화한다. 그리고 이런 믿음은 사회적으로 유의미해지고 말았다. 다른 말로, 학생들 사이의 공부 노동 경쟁이 과열된 것이다. ‘적당히’의 기준은 점점 높아진다. 이는 결론적으로 사회가 학비와 공부 노동의 임금을 지나치게 높게 책정하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학생이 공부 노동의 임금을 받기 위해서는 취업을 해야 한다. 그러나 기업은 필요 이상으로 과한, 노동자의 임금에 포함되어 있는 공부 노동의 임금 지급을 피하기 위해 취업을 줄인다. 취업이 되지 않는다면 공부 노동에 든 비용, 즉 학비는 매몰 비용이 된다. 학생은 그 부담을 납세 불가한 상황 및 결혼, 출산의 거부를 통해 가정과 정부에 책임을 넘긴다. 가정은 가난해져서 소비를 줄이고, 이는 다시 기업에 타격을 준다.

늦어진 취업 시점은 소비 가능 인구를 줄인다. 소비 가능 인구가 줄면 불경기가 닥친다. 불경기가 닥치면 학생들은 공부 노동을 통해 경쟁력을 확보하려 한다. 그 과정에서 공부는 시장 경제 체제에 더 단단히 매이게 되며, 그 부작용도 더 깊이 흡수한다. 단적인 예로 공부는 하기 싫은 것이라는 인식이 있다. 노동자가 노동에서 소외된 것처럼 학생(공부 노동자)은 공부(공부 노동)에서 소외된 것이다.